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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시대에 필요한 인재와 교육 -생각하는 일 만큼은 외주를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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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 Top-story 작성일23-06-2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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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9.]


ChatGPT시대에 필요한 인재와 교육

- 생각하는 일 만큼은 외주를 줄 수 없다 - 



이은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생성형 인공지능을 여러 분야에서 적용해 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 있는 이때, 이 변화가 결국 우리 시대의 인재상을 어떻게 새롭게 그려낼 것인지 또 그런 인재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 우리가 모두 이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기 때문에 이 변화의 끝에 다다르게 될 지점이 어디가 될지 예측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의 다양한 예측 속에 우리가 공통으로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시대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점 하나뿐이다. 인류의 지성사에서 여러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그 모든 변혁의 순간마다 사람들이 역사적 순간을 관통하고 있음을 매번 직감했던 것은 아니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르네상스 피렌체를 인문예술부흥의 중심지로서 피렌체 찬가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시대의 변곡점을 알았던 소수의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자기들 시대의 특별함을 모르고 지나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가 더욱 특별한 것은 이 변화에 대해서 일부 특정 영역의 전문가들만이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도 인공지능으로 인한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그 많은 사람 중의 일부로서 오늘, 이 지면에서는 어떻게 인재를 교육할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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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기술사의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항상 인간 능력을 기술을 통해 외주를 주는 작업이 이루어져 왔었다. 우리는 자동차를 만들어 우리가 달릴 수 있는 능력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게 되었고, 통신장비들을 만들어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거리보다 더 먼 거리에서도 소통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비행기를 만들어 우리가 가지지 못한 능력이었으나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전자계산기를 통해 어렴풋한 실루엣이 비추어졌듯이 인공지능도 결국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깊고 더 넓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외주화 작업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발전을 여타의 기술개발과 마찬가지의 층위에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면 이 기술의 외주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개발해 온 많은 기술과는 차원이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하는 능력은 생각보다 복잡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아직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 인지과학, 신경과학, 뇌과학 등의 많은 연구를 쌓아오고 있지만 우리가 우리의 인지 및 사고 과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제프리 힌튼을 비롯하여 인공지능의 오랜 겨울을 끝내고 찬란한 봄으로 인도한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우리의 뇌 신경망이 사고하는 방식을 모방하는 형태로 인공지능의 발전을 이끌어왔는데, 문제는 아직 우리가 우리의 사유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전통적인 방법으로 다 규명하기 힘들었던 우리의 생각 생성과 지능에 대해 이제 인공지능을 통해 거대하면서도 효율적인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모델설계와 적용 분야에 걸친 여러 변수를 다양하게 바꾸어 보면서 생각의 프로세스 중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던 영역들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실험이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 혹여 파국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여러 규제를 통해 더욱 안전한 방식으로 시간을 갖고 이 실험을 설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매일 현장에서 많은 학생을 만나며 그들의 지적, 정서적, 신체적 전인격에 걸친 성장을 돕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불확실성이 걷히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적어도 생성형 인공지능의 변화의 여파를 다 가늠하기 전까지는 현재진행형과 미래형의 교육을 모색하는 우리의 시도를 계속 발전하며 변화하고 있는 기술 변수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존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늘 바른 교육의 방향이라고 꿈꾸었던 가치 상수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항상 추구해야 할 교육적 이상으로 상정했으나 도달하지 못했던 목표가 무엇인가?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그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지는 않을까? 또 어떻게 이 기술 활용의 부작용을 줄이고 장점을 극대화할 것인가? 이미 이루어진 일, 앞으로 곧 이루어질 일,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 이렇게 크게 세 가지 방향을 짚어보기로 하자.


1. 이미 이루어진 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지금의 인공지능기술은 이미 대화형 인재를 양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도약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2022년이 더욱 특별하게 기록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대화의 형태로 인공지능을 경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ChatGPT가 거의 일주일 만에 백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하게 된 것은 GPT3에 비해 단순히 파라미터의 개수를 늘리고 성능을 끌어올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대화라는 방식으로 쉽게 경험해 보도록 초청했기 때문이다. 자연어처리 기술에서 대여섯 차례 컴퓨터와 대화를 주고받고 나면 더 이상의 대화다운 대화가 어려웠던 기존의 기술적 족쇄에서 풀려나 지금은 누구나 꽤 자연스럽게 인공지능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을 대화편으로 남겼듯이 그리고 그 속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스승 소크라테스가 흔히들 산파술이라고 부르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다시 정의하고 기존의 해석에 도전하며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개념에 대해 더 깊은 철학적 사유를 하도록 이끌었듯이, 우리는 대화를 통해 인재를 교육하는 중요성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었고 또 앞으로의 인재가 그렇게 대화 속에 배움을 발전시켜 가기를 기대해 왔다. 물론 이때의 대화는 상호 질문을 통해 대화자 쌍방이 대화의 시작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는 전제를 갖는다. 그래서 종종 대화형 인재는 질문하는 능력으로 연결되어 강조되기도 했는데 이 질문하는 능력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2010년 9월 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에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하는 우선권을 주었으나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던 그 정적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여러 채널을 통해서 우리는 왜 질문하지 않느냐는 반성을 여러 차례 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로 플립러닝을 도입하여 질문 중심의 수업을 만들기도 했고, 아예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의 그 유명한 원탁토론 하크니스 테이블(Harkness Table)처럼 동그랗게 둘러앉아 대화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강의실의 물리적 구조를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사실 알고 있었다. 이 모든 노력 이전에 자신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질문하는 연습이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쌓여야 공개된 장소에서 질문하는 척하기 위해 억지로 하는 질문이 아니라 정말 궁금한 것을 망설이지 않고 물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런 의미에서 ChatGPT는 이런 사람들의 내밀한 욕구를 적확하게 채워주고 있다. 비록 내 계정에서 내가 했던 바보 같은 질문들의 목록이 남아있기는 하겠지만 이제 언제든지 편하게 궁금했던 것들을 숨기지 않고 물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이 미숙한 인공지능은 우문현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ChatGPT가 더 좋은 질문에 대해 더 좋은 대답을 주고 있기에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질문을 다듬고 또 다듬고 있다. 그렇게 진짜 질문과 좋은 질문을 통해 대화하는 능력을 키워 보려는 그동안의 우리 노력은 이 생성형 인공지능의 발전과 함께 결실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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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앞으로 곧 이루어질 일


  생성형 인공지능이 도달하게 될 수준을 고려하면서 우리가 교육과 관련하여 짚어야 할 부분은 이 인공지능이 학생들의 표현능력을 확대하는 데 곧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영재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르네상스에 등장했던 여러 박식가를 떠올리곤 한다. 폴리매스는 그리스어 원어 그대로 풀이하자면 많은 분야에서 배움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랬고 데카르트가 또 그러했다. 폴리매스를 언급하는 사람들은 종종 지금의 교육이 특정한 한 영역에서만 탁월할 뿐 다양한 영역들을 포괄하면서 더 통합적인 통찰을 선보이는 인재들을 길러내지 못한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반대로 르네상스 시기보다 인간세계와 자연 세계에 대한 탐구가 더 발전 심화하면서 각 학문분과로 전문적으로 나뉘게 된 지금의 상황에서 통합형 인재는 때로 환상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앞으로 계속 추구될 생성형 인공지능의 발전 방향이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와 소리를 포함한 멀티 모달리티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인공지능기술의 지향점이 이러하다면 이 기술은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텍스트, 이미지, 소리에 걸쳐 다양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예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 흥미진진한 소설을 쓸 수 있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는 아주 서투르고 음악에도 별다른 조예가 없다고 해보자. 그러나 우리가 이미 DALL-E와 Midjourney를 비롯한 이미지 생성 AI도구와 AIVA나 Soundful같은 음악 생성 AI도구에서 경험하고 있듯이, 이제는 텍스트기반의 묘사를 통해 다른 모달리티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제이슨 앨런이 미드저니를 활용하여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을 만들었을 때는 나름 막대한 노동을 요구하는 치밀한 프롬프트 작성이 필요했었지만, 좋은 이미지와 음악을 만드는 텍스트 프롬프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간결한 방향으로 진화해 갈 것이다. 따라서 근 미래에 우리는 르네상스의 폴리매스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전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보고, 듣고, 읽고, 만질만한 것으로 가득 찬 학생들의 재기발랄한 자기표현들을 대하게 될 것이다.


3.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


  이전보다 더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고 또 자신이 편하게 느끼던 경계를 벗어나 훨씬 더 다양하게 생각을 표현하게 되겠지만 이 모든 발전이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 교육자, 부모, 학생 모두가 노력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학생이 자기만의 생각을 갖는 일인데 이 목표는 아주 치열한 싸움을 거쳐서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서두에 이야기한 인간 능력의 기술의 외주화 작업에서 우리는 얻은 것이 있는 만큼 잃은 것들이 많았다. 계산기를 예로 들면 우리는 아직도 계산기 사용에 대해 미국보다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계산기의 교육적 효과 및 부작용에 대해서 논란이 많겠지만 적어도 학생들이 계산하는 능력을 점점 더 잃어버리지는 않을까에 대한 염려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은 까닭이다. 또 내가 공부하는 서양 고전을 예로 들면, 오늘날의 학자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학자들보다 그리스어 라틴어 고전어 실력이 다소 부족한 편이다. 고전어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들이 잘 구축되어 있어서 예전만큼 치밀하게 외우지 않아도 손쉽게 각 단어에 대한 정보에 접근하여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DeepL을 비롯해서 여러 번역기의 성능이 높아질수록 외국어를 공부하는 수고로움을 유예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전통적인 교육에서 애쓰며 구축해 왔던 이런 여러 학습 능력의 많은 부분을 기술에 위임하여 편리함과 맞바꾼다고 하더라도 결코 기술에 외주를 주지 말아야 할 영역이 있다. 그것이 바로 생각하는 능력인데, 내 생각을 인공지능기술이 대신해 주기를 기대하는 순간 이미 나는 생각하는 나로서의 주체성은 잃게 되고 기계에 의해 산출된 생각은 더 이상 내 생각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기술 발전에 관련된 많은 논의를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 인문학자로서 내가 발견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위험한 기대 중 하나는 인공지능이 나를 대신하여 그럴듯한 생각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만큼 생각하는 일은 귀찮기도 하고 수고가 따른다. 그러나 이 편리함의 유혹에 빠지기 시작하면 내 생각이나 내 옆 친구의 생각은 다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해질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생각의 모범답안이 아니라 각 사람의 고유한 생각이고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통일된 구조로 병렬화되어 압도적으로 연산을 수행하는 컴퓨터에 결코 맡길 수 없는 이유이다. 영어 표현 중에 food for thought란 말이 있다. 인공지능 기계에 생각하는 일 자체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더 탁월한 생각을 만들기 위한 음식만을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글도 한 사람의 고유한 생각의 결과이다. 그 생각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부딪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저마다의 생각이 없다면 대화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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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쪼록 학생들이 인공지능이 수집하는 방대한 지식의 소극적인 소비자로서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생각을 기반으로 나만의 지식을 큐레이션 할 수 있는 지식의 적극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도록, 또 그 생각들을 자신이 다소 부족한 표현방식으로도 다양하고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게 되도록, 그래서 누구나 거침없이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나누는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되도록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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